
데자뷔라는 말이 있다. 처음 겪는 일인데도 이미 본 듯한 착각이다. 심리학은 이것을 마음이 만든 환영이라 부른다. 그러나 지금 중동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환영이 아니다. 실제로 한 번 일어났던 일이, 마치 같은 필름을 두 번 거는 영사기처럼, 글자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되풀이된다.
202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트럼프는 당시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에게 편지를 띄웠다. 두 달 안에 핵 협상을 매듭짓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다는 경고였다.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는 4월 오만으로 날아가 외교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 문을 닫아건 것은 이스라엘의 손이었다. 6월 13일 '라이징 라이온 작전'으로 포성이 외교를 앞질렀고, 열이틀의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이란 핵시설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한 해. 대본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다시 이란을 향해 일제히 공습을 퍼부었다. 이 폭격으로 하메네이가 목숨을 잃었다. 전문가 회의는 사흘 만에 그의 아들 무즈타바 하메네이를 새 최고지도자로 세웠다. 반세기 가까운 이슬람 공화국 역사에서 최고지도자가 바뀐 것은 이번이 두 번째에 불과하다. 같은 강을 두 번 건 넌 셈이지만, 강물은 그새 훨씬 더 차고 깊어졌다.
여기서 마음이 서늘해진다. 지난 석 달의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감시단체 집계로 이란에서 3,000명 넘는 사망자가 나왔고 그 절반가량이 민간인이었다. 레바논에서도 3,600명 이상이 스러졌다. 숫자 뒤에는 저마다의 식탁과 이름과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그런데도 작년 6월의 비극을 그대로 재생하려는 시도는 잔혹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반복이다.
백악관은 두 가지 물음 앞에 서 있다. 지난 한 해의 폭력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그리고 충돌이 거듭될수록 이란의 핵무장 가능성은 낮아졌는가, 높아졌는가. 두 번째 답은 차라리 간명하다. 지도자와 안보 내각 대부분을 잃은 이란은 그 어느 때보다 핵을 간절히 원할 것이다. 다만 우라늄 농축이 정점에 이르고 과학 인력 대부분이 건재하던 작년 4월보다, 폭탄 제조는 한층 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그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감시망 아래, 부서진 잔해 속에서 농축 물질을 수습해야 한다. 불가능하진 않으나, 결코 손쉽지도 않은 길이다.
문제는 첫 번째 물음이다. 위안이 되는 답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이제 자신이 제거한 적들의 살아남은 후계자들과 마주 앉아야 한다. 폭력과 슬픔이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주기를 바랄 뿐이지만, 아버지와 가족을 잃은 신임 지도자가 순순히 화해의 손을 내밀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미 같은 벽에 부딪혔다. 탈레반 지도부를 향한 끝없는 야간 공습은 분노로 들끓는 아들들을 권좌에 앉혔고, 막상 협상의 자리에서는 타협을 알던 원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우두머리를 베면 더 모진 우두머리가 자란다는 이 오래된 교훈이, 이번에도 그대로 무시되었다.
미국이 입은 상처는 네 군데다. 첫째, 억지력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중부사령부는 1만 3천 곳 넘는 표적을 때렸다지만, 이란이 드론과 기뢰와 미사일로 일으킬 혼란은 여전히 워싱턴과 동맹의 잠을 빼앗는다. 이란이 세계 교역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을 닫아걸자 두려운 것은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고유가가 부르는 경제의 한기였다.
둘째, 핵심 동맹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헝클어졌다. 신속한 공격을 줄곧 압박해 온 네타냐후를 향해 이제는 미국이 헤즈볼라 대응의 고삐를 죄려 한다. 바이든 시절 가자에서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던 나라가 보이는 반전이다.
셋째, 6월 7일 이스라엘이 베이루트 남부 다히에를 친 뒤, 이란은 이스라엘을 향해 탄도미사일을 쏟아부었다. 분석가들은 이란이 다른 나라를 공격한 이스라엘을 직접 타격한 첫 사례라고 짚는다. 침체기에 있어야 할 나라가 도리어 전략적 자신감을 과시한 장면이다.
넷째, 스스로 택한 전쟁은 트럼프의 평판마저 깎아냈다. 중간선거를 앞둔 경제, 평화 중재자라는 이미지, 노벨상의 꿈까지, 그가 두 번이나 폭격으로 깨뜨린 합의를 이제 와 다시 붙들려 애쓰는 모습이 그것을 증언한다.
우리가 중동에서 배운 진실은 단순하다. 칼로 그은 평화는 칼자국만 남기고, 두려움으로 누른 질서는 더 큰 두려움을 키운다는 것이다. 강자는 늘 같은 강을 다시 건널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두 번째 강을 건넌 후 그가 만나는 것은 처음의 강물이 아니라, 자신이 흘려보낸 핏물로 불어난 강이다. 60일이라는 또 하나의 시한이 째깍거린다. 이 시계가 평화로 멈출지, 세 번째 폭격으로 다시 감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거 하나. 무력은 적의 몸을 무너뜨릴 수 있어도, 적의 마음을 설득한 적은 없다. 무너진 자리에서 자라는 것은 화해가 아니라 더 깊은 원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실패를 세 번 반복하고도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전략이라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끝내 멈추지 못하는 비극이라 불러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