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이야기: 몰트만 편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은 안락한 서재에서 탄생한 이론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수용소, 죽음과 절망이 공기처럼 떠돌던 그 참혹한 현실 속에서 피어난, 한 영혼의 고백이다.

-희망은 우리의 감정이나 상황에 근거하지 않는다. 희망은 2천 년 전, 그 빈 무덤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닻을 내린다.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삶은 때로, 견고하게 닫힌 문 앞에서 우리를 멈춰 세운다. 그것은 의사의 마지막 선고일 수도,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러운 부재일 수도, 혹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실패의 잔해일 수도 있다.

 

그 거대한 '끝' 앞에서 인간은 묻는다. "이것이 끝인가? 이 절망 너머에도 과연 길이 있는가?"

 

이 질문은 한 인간의 실존적인 물음이자, 가장 깊은 신학적 물음이다. 그리고 여기, 그 질문의 가장 밑바닥, 찢겨진 역사의 한복판에서 '희망'을 길어 올린 한 신학자가 있다. 바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다.

 

그의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은 안락한 서재에서 탄생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수용소, 죽음과 절망이 공기처럼 떠돌던 그 참혹한 현실 속에서 피어난, 한 영혼의 고백이다.

 

절망의 잿더미에서 발견한 빛

 

몰트만은 20대 초반,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된다. 그가 갇힌 수용소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내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끔찍한 절망과, 독일 민족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마주하며 신(神)을 향해 절규했다.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그는 한 권의 낡은 성경을 만났고,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희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관주의(Optimism)'가 아니다. 낙관주의는 "다 잘될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인간적인 자기 최면이다. 그것은 현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거나 축소하려는 값싼 긍정이다.

 

하지만 몰트만이 발견한 '희망(Hope)'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되, 그 고통이 '마지막'이 아님을 선포하는 담대한 믿음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한복판을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희망의 닻: 빈 무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몰트만은 그 근거를 오직 한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둔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죽음'이라는 절대적 절망, 그 '최종적인 끝'을 하나님께서 깨뜨리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함이 없다"라는 사실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증거이다. 십자가가 모든 인간적 가능성이 끝나는 '종말'의 자리였다면, 부활은 그 종말 속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이 몰트만 신학의 심장이다. 희망은 우리의 감정이나 상황에 근거하지 않는다. 희망은 2천 년 전, 그 빈 무덤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닻을 내린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시간을 뒤집는 혁명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

 

우리는 보통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제, 나의 실패, 나의 상처가 오늘의 나를 규정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과거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러나 부활의 희망을 가진 자는 다르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힘에 밀려 '등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미래의 약속'에 이끌려 '앞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하나님의 미래(하나님의 나라)가, 오늘의 이 고통스럽고 불완전한 현재를 끊임없이 침투하고, 재구성하고,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칠흑 같은 터널을 걷는 것과 같다. 절망은 터널의 어둠만 바라보는 것이다. 낙관주의는 "곧 끝날 거야"라고 눈을 감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저 멀리 보이는, 작지만 분명한 '출구의 빛'을 바라보며, 그 빛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그 '미래의 빛'이 지금 나의 '현재의 발걸음'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릴 때, 인내하며"(롬 8:25) 기다릴 수 있다.

 

고난, 희망이 태어나는 자리

 

그렇다면 이 희망은 오늘의 고통을 없애주는가? 아니다. 몰트만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은 고난의 가장 깊은 곳, 바로 '십자가'에서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철저히 버림받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신학 역사상 가장 깊은 절망의 외침이다. 하나님의 아들조차 하나님께 버림받는 이 순간, 모든 희망은 끝난다.

 

그러나 몰트만은 바로 이 지점에서 희망이 태어난다고 선포한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0(제로)이 되는 그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무(無)로부터의 창조'로 부활의 생명을 불러내신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 되는 지점.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교차점이며, 희망이 탄생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이 신학은 우리의 삶에 거룩한 위로를 준다. 나의 가장 깊은 절망의 자리,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그 실패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희망'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롬 5:3) 믿음을 실천한다. 고통은 여전히 아프지만, 더 이상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됨을 알기 때문이다.

 

희망은 사적이지 않다

 

마지막으로, 몰트만의 희망은 결코 '개인'의 구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회복'으로 확장된다.

 

만약 하나님이 죽음을 이기신 분이라면, 그분은 '죽음의 세력' 또한 미워하신다. 죽음의 세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만이 아니다. 정의가 사라진 사회, 억압받는 자의 신음, 분열된 공동체, 가난과 무관심.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을 파괴하는 '사회적 죽음'이다.

 

부활의 희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위험한' 존재이다. 그는 이 불의한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는 하나님의 '미래의 정의'를 이 땅에 '현재'로 끌어오기 위해 싸우는 자이다.

 

희망은 나 혼자 천국 가는 탈출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부활의 운동'이다.

 

그렇다. 몰트만의 신학은 강의실의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부서진 일상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이며, 잃어버린 이웃을 다시 품을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다.

 

희망은 믿음에서 시작되어, 이 땅에서의 '사랑'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절망 속에서도 그 이야기를 살아내려 몸부림치는 우리가, 곧 희망의 증거이다.

 

*위르겐 몰트만(독일어: Jürgen Moltmann, 1926년 4월 8일~2024년 6월 3일)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사상가이다. 튀빙엔 대학교 신학대학 명예 교수를 했으며 에베하르드 융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대표적인 독일 개신교 조직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괴팅엔 대학교에서 오토 베버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본 대학교를 거쳐 1967년 튀빙엔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가 되어 1994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칼 바르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에른스트 블로흐 등의 영향 아래 종말론, 정치신학, 그리스도론, 성령론, 창조론에 관한 저서를 남겼으며 해방신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84~85년에는 기포드 강연의 강연을 맡았으며 2000년에는 루이빌 대학교에서 수여하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받았다. 미하엘 벨커, 미로슬라브 볼프 등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작성 2025.11.11 17:48 수정 2025.11.12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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