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제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기억은 지워져도 사랑은 남는다.

여기가 어디니? 집으로 보내 줘.

사랑은 기억을 잃어도 마지막까지 남는 향기.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어느 순간, 92세 어머니의 눈빛이 낯설어졌다.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던 어머니가 물었다. “누구세요?”

 

평생을 교직에 몸담으시며, 누구보다 당차고 총명했던 분. 붓글씨와 그림에 능하며 늘 자식들의 자랑이었던 어머니였다. 두 해 전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뒤, 어머니는 섬망(헛것을 봄)과 치매라는 짙은 안갯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그 한마디에 내 마음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모든 시작은 한밤중의 전화였다. 새벽녘 다급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집안에 아파트 경비가 들어와 있다고 했다. 짐작은 했지만, 며칠간 어머니 댁에 머물며 지켜보는 동안 현실은 더 아프게 다가왔다. 밤마다 홀로 집 안을 서성이며 허공에 대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고, 옷장을 활짝 열고는 “거기 있지 말고 이리 나오너라!” 하고 소리쳤다. 방금 알려드린 내 이름을 잊고 다시 묻기를 수십 번. 수십 년을 사시던 집을 낯설게 느끼면서 어디에 사시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어느 날 새벽에는 자기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가 손목에 채워드린 전화번호 덕분에 간신히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결국 우리 자녀는 상의 끝에, 24시간 돌봄이 가능한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니? 집으로 보내 줘”

 

낯선 환경에 불안해하시는 어머니께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잠시 오신 거예요. 다 나으면 곧장 집으로 가요.” 어머니를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서는 길,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것이 정녕 현대판 고려장이 아닐까, 죄책감과 슬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처음에는 속상함이 너무 컸다. 평생 자식만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어머니가 아니던가. 배고픈 시절에도 당신의 밥을 덜어 자식의 입에 먼저 넣어주셨고, 직장에서 고된 일로 번 돈을 아낌없이 우리 자녀의 학비와 용돈으로 내주셨다. 자신은 해진 옷을 입을지언정 자식에게는 늘 새 옷을 입혔던 분이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음식조차 자식들을 주기 위해 싫다고 좋아하지 않은 음식이라고 거짓말까지 하시면서 오직 우리만 먹기를 바라던 분이셨다. 아니, 우리가 좋아하는 그 모든 건 어머니에게는 다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희생의 세월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당신이 낳아 기른 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어머니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그 깊은 사랑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비록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사랑은 어머니가 희생하며 평생을 바쳐 길러낸 우리 안에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하루가 바로, 어머니의 헌신이 뿌린 씨앗이 맺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치매라는 병은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그 잔인함을 넘어설 힘은 결국 사랑에 있다.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우리는 어머니를 알아본다. 우리가 기억한다. 우리가 어머니의 손을 붙잡는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한평생을 바쳤듯, 이제는 자녀인 우리가 부모의 남은 생을 온전히 붙들어야 할 시간이다.

 

이제 나는 어머니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어머니, 우리를 몰라보아도 괜찮아요. 평생 우리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었던 그 사랑을 우리가 영원히 기억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를게요. 이제 우리가 어머니를 굳게 붙들게요.”

 

오랜 시간 풀리지 않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기도하던 중, 주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셨다. “평생 고생한 내 자녀들이 늙고, 병들어 고통받는 것이 안타깝고 측은하지만, 그래야만 너희는 이 땅을 떠나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단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까지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아무도 하늘 본향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린도후서 5:1-2)

 

우리의 육신이라는 ‘장막 집’이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 본향에 예비된 영원한 집을 소망하게 된다. 지금의 이 탄식과 고통은 사라질 것을 붙드는 아픔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덧입기 위한 간절한 사모함인 것이다.

 

삶의 마지막 여정에서 비틀거리는 우리 부모의 걸음을 지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사랑이 기억보다 위대하며, 섬김과 헌신이 병보다 깊다는 것을 배워간다. 생명의 끝자락에서도 희망은 마르지 않음을 깨닫는 가장 인간적인 배움의 시간이다.

 

우리 또한 언젠가 이름 없는 황혼의 강가에 홀로 서게 될 것이다. 그때 누군가 우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기를 소망한다면,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부모의 손을 굳게 잡아야 한다. 사랑을 붙드는 이 손길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빛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억을 잃어도 마지막까지 남는 향기다. 지금, 우리의 손에 그 고귀한 향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작성 2025.10.04 17:13 수정 2025.11.02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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